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문단 편집) === 몰락과 폐위 === 하지만 상술한 정책 중 그 무엇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카사 메르하와 메넬리크는 호시탐탐 제위를 노렸다. 카사 메르하는 영국 장교 존 커크햄을 군사 고문으로 삼고 영국군이 주고 간 무기를 보급해 군대의 서구화를 착착 진행했고 1870년에는 해로를 뚫어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를 재개했다. 메넬리크는 야망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당장 거병하지는 않고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와 카사 메르하가 싸우게 두며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시간적, 자금적 여유를 셰와의 서구화에 쏟아부었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적의를 거두지 않는 카사 메르하가 두려워졌고, 그가 더욱 강해지기 전에 짓밟으려 했다. 황제는 메넬리크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단독 군사만 이끌고 1871년 초에 티그레이로 북진하여, 6월 1일에 타카체 강을 사이에 두고 카사 메르하의 군대와 조우했다. 이들은 한참 동안 서로 기싸움을 벌이다, 카사 메르하가 먼저 타카체 강을 건넜다. 양군은 6월 21일에 타카체 강 남안의 마이콜루에서 만나 마이콜루 전투를 치루었다. 양군의 전력차는 제법 컸는데,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진영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 6만 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한 반면 카사 메르하는 1만 2천 명의 군대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양군의 차이점은 서구화 개혁으로,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의 군대는 대다수가 머스킷과 창, 활로 무장한 반면 카사 메르하의 군대는 완벽히 서구화되었고 12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이런 양군이 맞붙은 결과는 충격적으로, 카사 메르하는 황제를 압도했다. 심지어 전투 중에 존 커크햄이 직접 이끄는 800명의 보병대가 수 천명의 적군을 무찌르기도 했다. 패배한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황급히 퇴각하려 했으나, 카사 메르하는 기동전을 벌여 아드와에서 퇴각하는 황제군을 막아서고 포위했다. 이 1871년 아드와 전투[* 훗날 벌어지는 저 유명한 [[아드와 전투]]와 구분하기 위해 1871년 아드와 전투로 부른다.]에서 황제군은 전멸했다. 포로만 2만 4천 명이 나왔고 그 외의 병사들 중 멀쩡히 도주한 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 죽거나 다쳤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역시 싸우다 생포당했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즉시 폐위되었다. 그리고 실명당한 후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아드와에 있는 아바 가리마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그를 폐위시킨 카사 메르하는 칭제했고, 1872년 1월 21일에 대관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명은 [[요하네스 4세]]였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는 실명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몰락으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앓다가 1873년에 수도원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자식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그의 아내 딘키네시 메르하는 요하네스 4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별 일 없이 재혼했다. 재혼 상대는 라스 월데 키로스라는 귀족이었다. 요하네스 4세가 즉위 전에 사별한 후 재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으며, 이것이 인정받아 죽을 때까지 황후 호칭을 유지하며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분류:에티오피아 황제]][[분류:1836년 출생]][[분류:1873년 사망]][[분류:폐위된 군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